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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엄혹한 일제강점기 속 인천의 항일 운동 역사 재조명...① "민초들의 자발적 항일 두드러져"
인천 / 사회 강신일 (riverpress@ifm.kr) 작성일 : 2019-08-13, 수정일 : 2019-08-13
인천 용유도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문무현(왼쪽)과 항일 의미로 상가 폐점 운동을 벌였던 김삼수. <사진=인천역사문화센터>
[ 경인방송 = 강신일 기자 ]


(앵커)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지 74년째 되는 해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발굴하는 작업이 인천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경인방송은 광복절을 맞아 두 차례에 걸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인천의 항일 운동을 소개합니다.


널리 알려진 애국지사 뿐만 아니라 인천의 평범한 민초들의 삶 속에서도 항일의 기록은 뚜렷히 나타납니다.


경인방송 강신일입니다.


(기자)


1919년 인천 용유도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1899년생 문무현.


조명원, 조종서 등과 '혈성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격문 80여 종과 신서 1통을 작성했습니다.


4월 28일 관청리 광장에서 연 독립 운동에는 150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이후 문무현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서대문감옥에 수감됐습니다.


1900년 러시아에서 출생한 이안득은 1919년 4월 인천 삼산면 석모리에서 동네 사람 10여 명과 함께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보안법 위반으로 일제에 체포됐습니다.


인천역사문화센터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인천인 조사 연구에 수록된 인물들입니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는 일제 사법기관의 수사록과 판결문을 기초로, 일제강점기 다양한 사유로 체포된 인물의 행적이 사진과 함께 기록된 사료.


센터는 독립운동과 직접적 관련이 있고, 체포 또는 재판 당시 거주지가 인천에 해당하는 인물 72명의 신상과 행적을 발췌,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 김락기 인천역사문화센터장]

"살인, 국가총동원법 위반 등 독립운동과 관련이 적은 것은 빼고, 소요나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 항일운동 했던 사람들에 적용된 혐의만 정리한 것이고요. 실질적으로 보면 3.1운동 때부터 1930년대가 많고요."


확인된 이들의 상당수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평범한 민초들로 자발적 항일 의지가 바탕이 됐습니다.


1901년생 김삼수는 만세운동이 번지던 1919년 항일의 의미로 상인들에게 가게 문을 닫을 것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고, 농민으로 강화에 살던 염성오는 강화 만세운동을 이끌다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17년생 최순봉은 동생이 조선총독부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하자 조선군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반대했습니다.


특히 당시 기록에는 경찰이 누범자나 사상 등의 이유로 특정 인물들을 요시찰하고 관련기관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던 내용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 1934년 당시 인천노동조합의 임원이었던 권충일에 대한 요시찰 카드에는 수감자의 모습이 아닌 평소 일상을 담은 사진이 첨부돼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블랙리스트를 관리한 셈입니다.


3.1만세운동 이후 1930년대 인천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노동자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조직적 항일운동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 김락기 인천역사문화센터장]

"인천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깝고 일찍부터 동일방적, 조선인천주식회사 등 상대적으로 큰 공장이 들어섰고, 또 부두 하역 노동자들이 많았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관련된 요구들이 나올 수 밖에 없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되면 결국은 공산주의 계열이 지도하거나 조직한 항일운동이 되는거죠."


그러나 여전히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많은 항일 운동가들의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역사문화센터는 연구를 바탕으로 올해 안에 항일 운동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카이브 작업을 완료할 예정입니다.


경인방송 강신일입니다.



강신일 riverpress@if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