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토픽 법시사] 이승기 리엘파트너스 변호사


■ 방송 : 경인방송 라디오 <김성민의 시사토픽>
■ 진행 : 김성민 PD
■ 인터뷰 : 이승기 리엘파트너스 변호사

◆ 김성민 : 법으로 보는 시사 시간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이 과거사법이 지난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그동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던 '선감학원'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승기 변호사와 함께 관련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 이승기 : 네 안녕하세요.


◆ 김성민 : 우선 이번에 통과된 과거사법 주요 내용부터 살펴볼까요?


◇ 이승기 : 이번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2010년 6월30일 조사기간이 종료되어 해산됐던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다시 구성해 활동을 재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막판 쟁점이었던 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배상 보상 규정이 정부의 재정부담을 고려해야 한다는 통합당측 의견에 따라 이번 개정안에서는 배제가 됐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21대 국회에서 처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 김성민 : 10년 만에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그동안 과거사위원회가 활동을 못한 이유 어디에 있습니까?


◇ 이승기 : 우선 과거사법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5월 3일 제정됐는데요. 그해 12월에 활동을 시작해서 2006년 4월부터 2010년 6월까지 4년 2개월 간의 조사활동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2010년 12월 31일 해산이 됐는데요. 해산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 기한을 연장해주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에 대한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 더 이상 활동이 불필요하지 않냐고 하면서 유족과 시민단체, 그리고 학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과거사위원회의 정리 활동을 정리한 겁니다.

또한 박근혜 정부때에도 과거사정리위원회의 활동을 재개하는 내용의 법안이,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온 적이 있는데 당시 정부 역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결과적으로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규정의 취지인데 해산된 위원회를 다시 재개하는 것이 규정의 취지와 맞지 않다고 했고요. 국가재정에 큰 부담이 있다고 해서 이를 반대한 것입니다.

선감학원 전경 © 경기문화재단 경기창작센터
선감학원 전경 © 경기문화재단 경기창작센터

#외딴섬 선감도에 세워진 소년 수용소


◆ 김성민 :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국가가 국민들을 상대로 저질렀던 국가의 폭력 이런 것들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다시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경기도 안산지역 인근 선감도에 있었던 선감학원이라는, 아이들이 수용되어있던 시설에서 일어났던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우선 이 선감학원이 어떤 곳인지부터 말씀해주실까요?


◇ 이승기 : 선감학원은 대부도 인근에 있는 선감도라는 외딴섬에 세워진 소년 수용소입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감화령이라는 령을 내리는데 거기서 부랑아를 교화하겠다는 명분으로 만들었고요. 1942년 4월에 처음으로 200명의 소년이 수용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경기도가 이를 인수해서 전두환정권 초기인 1982년까지 40년 동안 운영한 곳입니다.


◆ 김성민 : 이 선감학원이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한 끔찍한 인권유린이 있었다는 증언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어요.


◇ 이승기 : 네 맞습니다. 당초 일본이 선감학원을 만들 때는 겉으로는 부랑아 갱신, 그리고 교육이라는 좋은 목적을 내세웠는데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이 소년들을 농업이나 광업에 강제 노역 시키고 태평양전쟁에 전사로 만들겠다 이런 것이 주요 목표였는데요. 이 과정에서 8~18세까지의 소년들이 강제노역, 학대, 폭행, 고문, 굶주림 등 인권유린을 당했습니다. 선감학원 자체가 외부와의 접촉이 불가능한 섬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고립되었고요.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소년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이 됐는데요.

대표적으로 농사기술을 가르쳐주겠다 자급자족이 필요하다 이런 핑계를 대면서 소년들에게 20만평에 달하는 농지를 스스로 경작토록 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소년들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했고요. 구타와 영양실조로 죽은 소년들도 있습니다. 또한 굶주림을 참지 못한 일부 소년들은 풀을 뜯어먹다 독버섯을 잘못 먹어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김성민 : 네. 당시 선감도가 옹진군이 행정구역이었어요. 그래서 물에 빠져 죽었던 아이들이 어떻게 물에 빠져 죽었나라고 살펴봤더니 선감도에서 인천앞바다쪽으로 헤엄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물에 빠져 죽은 원생들도 꽤 있었다. 이런 증언도 저희 취재진이 직접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 후에도 선감학원이 폐쇄되지 않고 경기도라는 지방자치단체, 당시에는 지방자치단체는 아니었지만요. 경기도라는 국가기관이 맡아서 운영을 계속 해왔다는 점 이거잖아요.


◇ 이승기 : 네 맞습니다. 불행하게도, 해방 이후 선감학원의 운영은 일제강점기 정책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어져 왔습니다. 미군정이 1946년 선감학원 시설을 경기도로 이관했는데, 경기도는 이번에는 선감학원을 부랑아 수용시설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정화다 또 사회갱생이라는 이름으로 행색이 초라하거나 길거리에 홀로 있다는 이유로 홀로 있던 아이들을 납치하다시피 하여 선감학원으로 끌고가 강제로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1982년까지 운영이 된 것입니다.

선감학원을 방문한 시찰단과 원생들의 모습(1956년) © 경기문화재단 경기창작센터
선감학원을 방문한 시찰단과 원생들의 모습(1956년) © 경기문화재단 경기창작센터

#소년들 마구잡이로 납치하듯이 데려가 수용


◆ 김성민 : 주로 어린 나이의 범죄자들이나 집이 없거나 연고가 없는 아이들이 수용된 건 아니잖아요.


◇ 이승기 : 아닙니다. 보호자 없이 길을 떠도는 부랑아 뿐 아니라, 단순히 거리를 배회하는 소년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했는데 납치하듯 데려와 수용한 거죠.

인권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피해자의 절반 이상이 부랑 생활이 아닌 가족과 함께 살다 갑자기 끌려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주요 사례를 보면, 한 아동은 전국체전을 보러 집에서 나왔다가 경찰에 끌려가 선감학원으로 보내졌고, 또 어떤 아동은 시장에서 길을 잃어 엄마를 찾으니까 경찰이 데려갔답니다. 미아 신고를 했답니다. 이 경찰이 집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선감학원으로 아이를 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길에서 맛있는 걸 사준다고 해서 따라갔다더니 그곳이 선감학원이었다 이런 증언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 김성민 : 5년 전이었던가요. 저희 경인방송 취재진이 만난 선감학원 생존자의 증언을 좀 들어보면 당시에 경기도 그쪽 지역에 놀러갔다가 아이들과 같이 놀러가 있었는데 경찰이 와서 '너 사는 데가 어디냐'라고 물어봤더니 주소를 좀 더듬더듬 대답을 했대요. 그랬다고 끌려가서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살면서 곡괭이로 맞고 삽자루로 맞고 수차례 구타를 당하면서 생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전히 경기도가 선감학원을 운영하면서도 인권유린이 있었지요.


◇ 이승기 : 말씀 주신 거랑 똑같은 내용인데요. 일단 이 선감학원의 당시 운영 지침을 보면 경기도가 1979년 발행한 선감학원 현황자료가 있습니다. 여기에 지도 방향이 나와 있는데 ‘지도 방향’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로서 서로가 사랑과 믿음으로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여 힘을 기르고, 성실한 마음을 바탕으로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깨우쳐, 자립생활의 꿈을 이루자” 참 휘황찬란한 표어를 내세웠는데 하지만 실상은 소년판 삼청교육대라는 말이 사치라고 할 만큼 참혹했습니다.

어린나이의 선감학원 원생들은 염전이나 굴 양식장, 농장 등에서 단 한 푼의 대가도 받지 못한 채 가혹한 노동착취를 당했고요. 그 과정에서 고문, 폭행, 협박 심지어는 성적 학대를 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급식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이 콜라병을 보고 마셨는데 그게 농약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 아이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감학원을 퇴원한 아동이 공식적으로 4710명 정도입니다. 근데 이 중 830여 명이 중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증언에 따르면 아이들의 시체가 선감학원 주변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암매장됐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국가권력에 의한 아동학대가 혹은 아동학살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경기창작센터 맞은편 산에 있는 선감학원 원생들의 공동묘지(2015년 촬영). © 경인방송
경기창작센터 맞은편 산에 있는 선감학원 원생들의 공동묘지(2015년 촬영). © 경인방송

#국가권력에 의한 참혹한 아동학대


◆ 김성민 : 이런 증언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길동이라는 아이가 죽어 있었다"라고 이런 증언도 있었는데, 이 죽은 아이의 이름이 왜 길동이냐 라고 물어봤더니 이름조차 제대로 지어지지 못한 아이가 같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죽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증언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선감학원 주변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에 묻혀있는 시신만 300구 정도로 추정이 된다는 그런 결과 조사 결과도 있었습니다.

이토록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선감학원에 이렇게 계속해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 이승기 : 일단은 '부랑아 교화'라는 명분으로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것인데요. 또 국가가, 정부가 또 후발적으로 그 근거를 제공해줬습니다. 바로 1975년에 발표된 박정희 정권의 내무부 ‘훈령 410조’가 그것인데요. 훈령 410조에서는 '부랑인에 대해 신고, 단속, 수용, 보호하고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해서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하자' 이런 취지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훈령이 사후적으로, 이 훈령을 근거로 해서 선감학원의 강제 수용 이런 게 다 정당화가 됩니다.

실제로 시 공무원이나, 경찰이 직접 아이들을 부랑아로 지목해 데려가기도 했고요. 시청이나 경찰로부터 부랑인 단속 허가증을 받은 민간인들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돈을 받고 넘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 김성민 : 돈을 주기도 하고 아이들을 선감학원 쪽에 데려다 주면 밀가루 두 포대를 줬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무부 훈령 410호 이거 자체가 위법한 건데, 선감학원 사건은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던 것 아닙니까?


◇ 이승기 : 그렇죠. 내무부 훈령 410조가 없을 때도 그렇게 해왔지만 이걸 만들 정도로 국가가 어쩌면 인권에 대해서 무감했던 거죠. 일단 훈령 410조를 보면, 부랑인을 단속하고 수용할 때 영장이 필요가 없습니다. 영장 없이 마구잡이로 잡아들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문제도 있는데요. 특히 말이 수용이지 실제로는 본인의 의사와 관련없이 특수감금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까지도 이 훈령이 허용해 준 것입니다.

또한 부랑인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자 ’,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 이렇게 표현하는데 이는 대단히 추상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매우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그냥 길에서 배회하는 아이들 혹은 집주소를 잘 모르는 아이들을 그냥 부랑아로 지목해 데리고 간 것입니다.

결국 국가가 부랑아 단속과정 전체를 조직 하고 지휘했습니다. 그리고 단속 현장에는 경찰과 공무원이 투입됐습니다. 이는 전대미문의 국가 주도의 아동인권유린 사건이라고 볼 것입니다.

이승기 리엘파트너스 변호사
이승기 리엘파트너스 변호사

#아동인권유린 가능하게 했던 '내무부 훈령 410호'


◆ 김성민 : 이 내무부 훈령 제410호 언제 폐지가 됐습니까?


◇ 이승기 : 예. 1987년경 폐지가 됐는데요. 마지막으로 적용된 게 전두환 정권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 훈령을 근거로 해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환경미화'라는 명분으로 부랑인을 잡아다 시설에 가뒀습니다.

이게 최근 문제되는 형제복지원 사건하고도 관련이 되는데요. 당시 경찰이나 구청직원들이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잡아와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에 넘긴 것입니다. 1986년 형제복지원 입소자 현황을 보면, 전체 3975명 중 약 84%가 국가기관에 의해 보내진 것입니다.


◆ 김성민 : 그런데 선감학원 사건은 형제복지원 사건과는 조금 다르게 참혹함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던 게 최근이에요.


◇ 이승기 : 네 맞습니다. 우선 선감학원 사건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인권유린이 원래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선감학원 부원장의 아들이었던 일본인 이하라 히로마쓰라는 사람이 1989년 소설을 냅니다. 소설 제목이 '아! 선감도'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6년 뒤인 1995년에 국내에서 이 소설의 번역본이 출간됐는데 그러면서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경기도가 선감도를 운영하던 그 시기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는 최근 정말 최근에 알려졌는데요. 이는 경기도의회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2017년 진상조사 연구용역을 하며 그제서야 알려진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이 일제치하를 거쳐 군사정권시절까지 철저히 은폐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진상규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결국 정부에게 그 원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늘 진실의 편에서 승리합니다. 이제라도 선감학원 사건이 그 진실을 밝혀서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은 거지만 그럴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들 그리고 아직 생존해 있는 그때의 그 소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 김성민 : 2015년 16년 당시에 경인방송이 선감학원 관련 기획취재를 할 때 병들어있는 당시 선감학원 수용자, 생존자 분께서 전화를 하셔서 "빨리 자기가 죽기 전에 선감학원의 진실이 낱낱이 다 세상에 밝혀져서 조금이라도 억울함이 좀 풀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선감학원 진상규명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승기 : 네 감사합니다.


◆ 김성민 : 지금까지 이승기 변호사와 말씀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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