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터뷰]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인천 중구 신포동의 김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 중구 신포동의 김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 방송 : 경인방송 FM 90.7MHz <김성민의 시사토픽>(월~금 07:00~09:00)

■ 진행 : 김성민 PD

■ 인터뷰 :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인터뷰 오디오 듣기]https://bit.ly/3B79GhL

◆ 김성민 : 이번 시간에는 이슈 인터뷰 시간으로 마련을 해보았습니다. 인천 지역에서는 최근 여러 가지 관점에서 예전에 제작돼 서 있거나, 현재 건립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상 등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동상과 관련된 올바른 역사적인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스튜디오에 나와주셨습니다. 관장님, 안녕하십니까?

◇ 조우성 : 안녕하세요.

"동상 건립은 새로운 인식에 의한 역사 쓰기"

◆ 김성민 : 먼저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기본적인 얘기를 해볼게요. 동상 건립의 보편적인 의의랄까, 성격으로 어떤 게 있을까요?

◇ 조우성 : 인류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역사는 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국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사람의 동상을 세워 후손에게 길이 전하고자 한 것은 그들이 지켜온 문화와 예술과 역사의 총합이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기리는 뜻 깊은 사업인 것입니다.

더불어 동상이라 하는 것은 한 시대의 문화 예술의 품격과 수준을 말하고, 그 인물을 역사에 편입 시키는 '새로운 인식에 의한 역사 쓰기'인 것입니다. 동상의 대상은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갑남을녀, 장삼이사가 아닙니다. 또 큰 돈과 당대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을 동원해서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바로 역사적 의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 본다면, '한 인간을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희가 알다시피 동상이라는 것이 생전에 세우지 않지 않습니까? 사후에 세우게 되니까 조각가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있어요. 생전에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실제로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누구에게나 '백범 동상‘이라는 상 앞에서 “아, 백범 선생이네” 하고 심정적으로, 미학적으로 인정을 하고 수긍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물 묘사에 우선 충실해야 합니다. 체형이나 복식 등도 다 살아생전의 인물과 방불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사진을 꼭 찍어 놓은 것처럼 극사실주의적 모습만이 동상으로서 유효하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동상의 가장 큰 관건, 인물 묘사"

◆ 김성민 : 말씀을 들어보면, 생전에 얼굴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했느냐가 동상의 가장 큰 관건이 되겠네요?

◇ 조우성 : 물론입니다. 조각가들에게는 큰 애로가 있습니다. 대부분 대상 인물과 생전에 말씀 한번 나눠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달랑 사진 몇 장을 가지고 그분의 인품이나 성향이나 위엄, 인간미 등을 표현한다는 건 참 어렵겠죠.

그런 점에서 간혹 유족이 살아 있는 경우에 그 유족들의 고증을 받는다면 조각가로서는 천만다행입니다. 그래서 유족들이 보고 "저게 우리 아버지예요." 한다면 부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얼굴이 굉장히 중요해지는 겁니다.

◆ 김성민 : 궁금해지는 게 키나 체구의 길이나 크기가 이런 것들이 관행적으로 정해진 사이즈가 있나요?

◇ 조우성 :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받침이나 좌대를 빼고 키 높이만 보면, 런던 명물 중의 하나인 트래펄가 광장의 넬슨 제독 동상은 키가 5.5m, 위싱턴 링컨기념관의 링컨 좌상은 6m, 전북 정읍시의 전봉준 동상은 3.7m, 서울 남산의 백범 동상은 6.2m, 미국 LA 시청 광장에 있는 안창호 선생의 동상은 2.4m, 파리 상젤리제 광장의 드골 동상은 3.7m, 육군사관학교의 안중근 동상은 3m, 서울 효창공원의 이봉창 의사 동상은 3m입니다.

또 어마어마하게 큰 것도 있어요. 북한 평양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은 무려 20m에 달하기도 합니다.

◆ 김성민 : 그러네요. 사실 동상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크기와 똑같은 등신대 동상은 없습니까?

◇ 조우성 : 있죠. 사실, 등신대 크기의 동상은 극히 예외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시각의 인지적 잠재 인식에서는 큰 것은 위대한 것, 힘이 있고 권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위대한 인물은 크게 만든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에요. 그래서 과거에 피라미드나 경주에 있는 오릉이나 다 크잖아요. 실제로 관에 들어가는 크기는 사방 몇 자도 안 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또 우리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미국 국립 공원의 역대 대통령 두상, 워싱턴에 새로 만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석상 등은 어마어마합니다. 산을 배경으로 해서 서 있는데요.

등신대로서는 유럽에 있는 헬만 헷세, 서울 교보문고 옆 벤치에 앉아있는 염상섭 소설가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약 실제 키의 1.4~1.5배는 되는 것 같아요. 등신대는 아니고요. 그래서 대략은 1.5배에서 2배 정도, 혹은 그 이상 필요에 따라 몇 십 미터 되는 겁니다. 반드시 등신대로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합니다.

◆ 김성민 : 인천에도 동상들이 많이 있잖아요? 인천에 세워져 있는 동상들의 크기는 보통 어느 정도인가요?

◇ 조우성 : 해방 이후에 인천에 최초로 세워진 동상은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상인데 8m이고, 서울 재단에서 만든 인천시립박물관의 우현 고유섭 좌상은 1.6m, 인천대공원의 백범 김구 동상은 2.8m입니다. 사실 모두 등신대는 아닙니다.

"시민 합의를 통해 제거해야 할 추모비도 있어"

◆ 김성민 : 해방 전에도 인천에 한국인 동상이 있었나요?

◇ 조우성 : 네, 있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동상 건립은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그것이 또 인물의 역사 편입의 한 과정이기도 하고요. 김윤복(金允福)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원래 부산 출신인데 인천으로 이주하여 인천항 경무서장, 인천부회 의원, 인천권번 대표, 인천불교진흥회장, 인천체육회장등을 거쳐 중추원 참의를 지냈습니다.

창씨명은 김해복윤(金海福允)이라 했습니다. 1937년 7월 23일 인천의 친일파들이 앞장서 그 사람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남사스러워요. 그를 ‘금세활불(今世活佛)’로 제목을 붙이고 "금세기에 태어난 살아있는 부처다"라고 했어요.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인이 공감하는 동상은 철거할 수 있습니다.

해방 직후 철거되었고 김윤복은 친일 거두로 반민특위 인천지부에 기소당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인천시가 ‘인천개항 100주년 기념탑’이라 해서 약 70~80억을 들여서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항이 일본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를 힘을 모아 철거한 일이 있는데요.

아직도 인천에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조선을 강점하겠다고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제물포해전 아닙니까?거기에서 죽었던 러시아 추모비가 연안 부두에 세워져 있어요. 이것은 말이 안 되죠. 거기서 외교 관계 운운하는데, 이런 것들은 잘못 세워진 것입니다. 앞으로 시민적 합의를 해서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천대공원의 김구 동상(좌)과 곽낙원 여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인천대공원의 김구 동상(좌)과 곽낙원 여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동상 건립 장소의 상징성도 중요"

◆ 김성민 : 사실 저는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제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인천대공원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을 그동안 봤었구나 생각이 되더라고요. 말씀해 주실 것들이 더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 조우성 : 우선 동상은 어느 장소에 세워지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분과 연계가 되는 그런 장소가 되어야 후세들이 추모하고 참배하는 데에도 더욱더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장소로 해서 그분의 행적과 발자취를 기릴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인천대공원에 왜 백범상이 건립됐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건립 당시 추진위 위원장인 동양화학의 이회림 회장과 최기선 시장 간의 부지 협의가 사전에 부진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다행스러운 일은,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사거하기 전 경기여중 미술교사인 박승구(朴勝龜) 선생이 있었는데 조각가에요. 그 곽낙원 여사의 조각을 백범의 고증을 받아서 박승구 선생이 완성했는데, 그것을 대공원에 다시 모셔온 것이에요. 참 다행스럽죠.

국내의 어느 상보다도 실제를 방불케하는 상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평생 모셨던 것이 백범 선생인데, 백범 선생이 "이것이 제 어머니 입니다"라고 인정한 상이 바로 인천대공권의 ‘곽낙원여사상’인 것입니다. 참 의미가 있죠.

그런데 재건을 했을 때 보니까 좌대도 없이, 그냥 이렇게 조그마한 상을 세워놓아서 아주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세상에 어머니보다 큰 자식은 없는 법인데, 그렇지 않나요? 그 어머니가 평생의 교육을 시켜 그 아들이 성장한 것인데, 어찌 어머니상을 저렇게 볼품없이 세워 놓았는가 생각이 들더군요.

◆ 김성민 : 왜 그랬을까 싶어요.

◇ 조우성 : 최근에 가보았더니 왼쪽에 옮겨 놓고, 대도 제대로 만들고 해서 그나마 격을 갖추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백범상을 다른 곳으로, 자유공원으로 옮기자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사실 이것은 역사 지우기 행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살필 것은 백범 동상 입구에 대공원 제 1호 매점이 들어와 있는데, 한껏 경건해야 할 분위기가 이로써 산만해져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인천시가 매점을 다른 쪽으로 옮기고 보다 참배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되지 않겠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 김성민 : 주변 환경도 말씀을 듣고 보니,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 조우성 : 중요하죠. 동상이 그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좌대와 기단과 주변 환경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천 중구 안에서만 백범 김구 동상, 4개나 있다"

◆ 김성민 : 좀 전에도 제가 인천대공원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었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매장에서 컵라면 사 먹으면서 또 오징어, 꽈배기를 먹으면서 김구 선생을 바라보는 게 '과연 후대에 예의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지적인 것 같습니다.

앞서 관장님께선 ‘동상은 한 시대의 문화 예술의 품격과 수준을 말하는 동시에, 그 인물을 역사에 편입 시키는 새로운 인식에 의한 역사 쓰기인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인천 중구의 ‘청년 김구의 거리’에 있는 백범 동상은 어떻게 보셨나요?

청년 백범이 아닌 낯모를 사람의 동상<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청년 백범이 아닌 낯모를 사람의 동상<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 조우성 : 일단은 인천시에 그렇게 규모가 크고 대대적으로 백범광장까지도 만들었지 않습니까? 인천광역시 안에 이미 백범 동상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구가 물론 장소성은 있어요. 백범 선생이 두 번이나 감옥에 갇히셨던 곳이 중구니까요. 또 노역을 하신 경험도 있고요. 그런데 '한 지역 안에 백범상이 몇 개냐' 이런 이야기가 되겠어요.

중구청이 조급하게 이것을 시행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청년 김구의 거리’라고 명명은 했는데, 물론 백범 선생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가 바로 청년 시기 아닙니까? 그런데 막상 그 거리에 가보면 ‘청년’은 보이지 않고, 노년의 백범만 계세요.

또 일제에 의해 지독한 노역을 당한 축항을 바라보면서 웃고 계시는 상이에요. 웃고 있는 모습이 어울리나 싶고요. 그리고 노역자상이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노역자상은 틀림없이 백범 선생일텐데,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영 백범 선생이 아니에요. 낯선 청년이 있더라고요.


신포동의 백범 김구 동상 뒤에 놓여진 곽낙원 여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신포동의 백범 김구 동상 뒤에 놓여진 곽낙원 여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또 하나는 맨 꼭대기에 모자 상이 있는데 어머니가 뒤에 있는 것이에요. 어머니가 뒤로 가있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결국엔 가부장적인 가치관의 은연중의 반영입니다. 어머니가 앞에 있어서 틀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죠? 그것도 이상하고요. 더군다나 맨 꼭대기에 모자 상이 있고, 그다음에 길의 의류 브랜드 가게 앞에 또 백범 상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인천에 백범 상이 몇 개 입니까?


4개가 되는 것이죠. 또 얼굴은 다 각기 달라요. 좀 혼란스럽습니다.

"중구의 백범 김구 동상, 보편적 시각 결여"

◆ 김성민 : 하나씩 문제점을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특정 의류 브랜드, 상점 앞 가게에는 받침대도, 좌대도 없는 등신대 동상인데 이는 어떻게 보시나요?

◇ 조우성 : 이 부분이 이제 동상이라는 상징적 예술품에 대한 보편적 시각이 결여된 것으로 봅니다. 이 세상 동서고금의 대다수의 동상이 왜 등신대를 추구하지 않고 크게 만들며, 그 좌대와 받침대를 각각 높다랗게 설치할까요? 바로 '우리가 무언가를 가져다가 기려서 받는다'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 워싱턴에 킹 목사의 석상이 거의 30m에 달합니다.

그렇다면 '등신대를 만드는 것이 평등 사상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은 이렇게 말해요. “높은 좌대와 향로 설치 등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제작된 인천대공원 동상은 현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좌대를 없애고 시민 눈높이에 맞춘 창의적 동상을 설치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평등 의식에 대한 좀 미진한 의식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국 의류 브랜드 앞 길바닥에 등신대를 세워놨어요. 외국 상품의 상점 아닙니까?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죠. 아까도 경관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곳에 굳이 백범 상을 세울 이유가 없는 것이죠. 똑같은 두 동상을 왜 맨 꼭대기에 세워놓고, 길바닥에 세워 놓습니까?

한밤에 바라본 신포동의 백범 김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한밤에 바라본 신포동의 백범 김구 동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청년 김구 역사거리' 동상, 올바른 의미 찾기 어려워"


◆ 김성민 : 관장님께서 직접 찍어서 보내주신 이 신포 문화의 거리에 있는 백범 김구선생 상을 저녁에 보니까요. 외국 브랜드의 불빛은 화려한데, 이게 제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백범 김구 선생의 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 조우성 : 글쎄요. 나중에 중구청이 조명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나 저러나 간에 마치 백범 선생이 저 외국 브랜드를 지키고 있는 착각이 들어서요. 이것은 좀 맞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또 하나는 '제대로 고증을 받았냐'라는 것 입니다. 인천대공원에 있는 고증 받은 상들은 전혀 달라요. 얼굴의 형이 고증 받은 상은 둥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신포동 것은 갸름해요. 그리고 곽낙원 여사의 코가 매부리코에 가까워요. 그런데 신포동 것은 직선이에요. 귀도 또 귓바퀴가 전혀 달라요. 그럼 다른 사람 아닙니까?

◆ 김성민 : 그러네요. 말씀 들어보니까 김구 선생이 살아생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헷갈립니다.

◇ 조우성 : 그런데 김구 선생도 대공원에 있는 것은 장년이에요. 여기에 있는 것은 노년이고요. 그런데 거리 이름은 또 청년의 거리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 김성민 : 좀 더 젊은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서, 웃고 있는 모습처럼 이렇게 좀 활달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싶은데요. 또 말씀을 들어보니까 동상이 가져야 되는 상징적 의미들이 굉장히 헷갈리는 것 같아요.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것이 청년 김구의 거리 맨 위 쪽에 있는 것이죠? 이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조우성 : 거기도 기단, 좌단이 없어요. 철제 스테인리스에다가 플라스틱으로 막을 쳐 놔서 동상 자체도 보이지가 않아요. 그래서 그것을 왜 그 곳에 세워 놓았나 하는 의문이 생기죠. 얼굴 형태도 인천대공원과도 전혀 다르고요. 또 곽낙원 여사가 뒤에 작은 체구로 서 있는 모습도, 안 세우니만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 김성민 : 축항의 노역자상도 굉장히 논란이 될 것 같은데, 노역자상은 누구를 만든 건가요?

곡괭이와 삽이 강조된 노역자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곡괭이와 삽이 강조된 노역자상 <사진제공=조우성 전 관장>

◇ 조우성 : 노역을 했다는 것은 백범 선생 아닙니까? 그래서 백범 선생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모자 밑에 얼굴을 보았더니 전혀 낯선, 건장한 청년이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더욱더 기가 막힌 것은 노동을 강조했는것은 모르겠지만, 삽은 길이가 1m34cm나 돼요. 곡갱이는 자루 길이가 1m55cm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노역자 상은 실물대로 해 놓고, 삽과 곡갱이는 과장해서 해 놓은 거잖아요? 축항 공사 자체가 현장감을 상실한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노역자가 아닌 지식인, 문화인이 바로 청년 백범의 모습"

◆ 김성민 : 거기에 더해서 백범 사료관을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 조우성 : 우선 발상부터 문제인데요. 감옥에 두 번이나 갇혔었고, 또 두 번째 옥살이에서 축항 공사 노역에 강제 동원돼 큰 고생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만이 청년 백범의 모습 전부가 아닙니다.

일제에 그만한 고생을 안 당해 본 사람은 그때 그 시절에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백범을 상징하는 것이 삽과 곡갱이 밖에 없습니까? 곽낙원 여사가 백범 선생을 뒷바라지했던 과정과 그 다음에 백범 선생이 감옥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잘 알지 못한 겁니다. 아니면 간과한 것이죠.

오히려 청년 백범 김구는 감옥 안에서 사형을 앞에 두고도 글을 모르는 죄수들에게 문자를 가르쳤어요. 기소장, 민원 같은 것을 글자를 모르니까 못 쓰지 않습니까? 백범 선생이 다 대필 해줬어요. 얼마나 큰 애민 정신입니까? 그리고 또 민요 등 옛날 노래들, 전통 음악을 가르친 것이에요. 죄수들과 같이 부르고 그랬어요.


그리고 또 백범 김구는 자신이 '태서신서', 태서라는 것이 구라파(歐羅巴)를 이야기합니다. 신서라는 것은 새로운 책들, 서양의 책들을 말하는데요. 백범 김구는 서양 책이 번역된 것을 구해서 부단히 읽고, 사형을 앞두고도 대학을 읽고 있었던 분이에요.

문화적인 지성인으로서 오히려 죄수들을 가르치고, 뭔가 죄수들에게 '사람이 사람 답게 살려면 이렇게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바로 알려준 것이죠. 그렇다면 그 높은 문화를 추구한 지식인, 문화인이 바로 청년 백범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죄수들도 다 노역은 했죠. 백범 일지에 이런 말이 나와있어요.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백범 자신이 교사 노릇을 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교육자의 모습의 백범상을 제작해서 기려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오히려 백범의 말씀, 이것이 오늘날 현실화되었어요. 오늘날 우리나라 노래와 드라마, 음식이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고 그 이름이 한류 아닙니까? 그래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사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백범 선생의 말이 맞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런 백범 정신을 구현한 것이 인천 감옥인데, 어쩌자고 노역한 부분만을 벽면이나 가로등 위에 세워 놓고 '여기서 노역을 했습니다'만을 강조하고 있는가 의문이 듭니다. 이것이 백범의 요체를 만든 백범 거리인가, 참 안타깝고요. 백범의 진면목과 정체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또 무슨 사료관을 만든다는 데, 사실 독립기념관에 상당수의 사료가 다 있습니다. 서울 효창공원 안에 백범기념관조차 진본 사료가 거의 없이 복제 사진, 복제 인쇄물로 도배를 하고 있어요. 무슨 기념관 박물관이 복제본과 기념물만 있습니까? 그러면 인천 중구에서 만든 사료관은 더욱 구하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앞으로 좀 더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해야 하고요.

주민 공청회를 한다고 하는데, 이미 뭐 다 해 놓고 공청회를 합니까? 앞으로도 중구청과 인천시가 백범을 정말 우리의 인천의 민족의 지도자로서 추모를 한다고 하면, 좀 더 섬세한 관심과 제고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존,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읽을 수 있는 역사를 써 내려 가는 것"

◆ 김성민 : 끝으로 한 말씀 더 묻겠습니다. 인천대공원의 백범 동상과 곽낙원 여사상을 자유공원으로 옮기고, 맥아더 동상을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혹은 전쟁기념관으로 옮기자는 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조우성 : 보는 시각에 따라서 견해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인물의 동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이미 그로써 그 나라와 지역의 역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오늘날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애써 써 놓은 그들의 역사이지요. 그걸 후손들이 옮기자는 것은 선대가 만들어 놓은 역사를 지우려는 그런 행위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내 주장만이 선이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아니라고 하는 이분법 적인 사회가 사회를 더욱더 혼란과 투쟁의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우리 시대에 판단하려면 안 되고요. 더욱더 이 시대에는 역사를 어떻게 재단하려고 애를 써요. 역사는 두고두고 역사 전문가들과 민족에 의해서 평가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존이라는 말을 잘 쓰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함께 읽을 수 있는 역사를 써 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존이에요. 우리 잘 아는 이야기로 과거의 독일과 프랑스는 아주 앙숙이었죠? 그 두 나라가 서로 역사 책을 공유해서 같이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크고, 우리도 선진국의 사례를 받아서 당대의 어떤 역사를 재단하려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동상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성숙한 시각으로써 역사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기를 바랍니다.

◆ 김성민 : ‘진정한 공존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함께 읽을 수 있는 역사를 써 가는 데 있다’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는 말인 것 같아요. 오늘 긴 시간 동안 인천의 동상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말씀까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조우성 : 감사합니다.

◆ 김성민 : 지금까지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과 말씀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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