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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상이 만난 사람과 책
MC 엄윤상 PD김국 작가 최지연
검은 설탕의 시간 - 양진채 작가
  • 경인방송 안병진
  • 댓글 : 0
  • 조회 : 1,508
  • 작성일 : 19-10-28

다시 듣기 http://www.podbbang.com/ch/177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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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채의 두번째 소설집.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양진채는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 스마트 소설집 『달로 간 자전거』, 장편소설 『변사 기담』등을 펴낸 바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 양진채는 단단한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활성화하고 있다. 이 활성화는 ‘후일담 문학’이 스스로 깊어지는 순간을 찾아내면서 존재의 윤리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소설집의 가장 좋은 작품 가운데 하나인 「애」는 우리에게 흩어지고 왜곡된 기억으로만 남은 사건을 건져내 다시 활성화하고 있는 탁월한 예다. 주인공 수경은 소위 ‘운동권’ 출신의 여성으로, 운동권이기를 중도 포기하고 인터넷신문 등에 글을 실으며 나름대로 안온한 삶을 살아왔던 인물이다. 그는 운동권이던 과거를 잊은 채 살고 싶어 한다. 안온한 삶을 위해 ‘운동’을 중도 포기했던 데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의 활동과 연관을 갖다 보면 같은 단체에서 만났고 얼마 전 먼저 죽은 남편의 이야기들과 엮이게 되어 괴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수경이 지역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쓰는 일을 맡아 떠나온 과거를 돌아봐야 하게 된 것이 소설 속의 상황이다. 부러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과거를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재구성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인데, 그에 대한 수경의 심경은 양가적이다. 특히 수경을 가장 괴롭히면서도 붙들어두는 것은 ‘동일방직 노조 똥물투척사건’의 주인공인 여성노동자 ‘그녀’이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나쁜 조건에 있었던 그녀가 비의식적으로 운동에 가담한 결과가 편한 삶의 가능성을 모두 뺏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으니, 그와 반대로 지속해야 했던 활동을 중단함으로써 편한 삶을 얻어낸 수경의 마음은 복잡하다.
이런 부채의식 탓에 수경은 어떻게든 그녀와의 직접 대면을 피해보려 한다. 그러나 인터뷰를 생략하기 위해 최대한의 자료를 모으는 동안, 수경은 오히려 저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마음속에 떨칠 수 없이 새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동일방직 노조 똥물투척사건’의 그녀와 수경 모두에게 영광으로 빛나고 동시에 상처로 빛나는 시간, 우리가 외면하고 살더라도 결국 우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어두는 시간, 이 작품은 그런 시간의 기억을 활성화한다.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겠다. 소설은 위대한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수경의 배가된 실패는 이 작품을 영웅서사시가 아닌 소설로 만들지만, 이 소설은 수경에게 작동하고 있는 충동의 윤리를 통해 근대소설이 포기해야 했던 영원성을 소설 장르의 형식 안에서 되살려내고 있다고.

양진채의 소설은 자주 인천 안에 있는 장소들이나 인천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새겨진 공통된 기억, 또 때로는 이미 잊혀져버린 장소나 인물, 사건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인천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역사 안에서도 중요하게 기억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그것들을 기억한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인천 근대사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동일방직 노조 똥물투척사건의 기억에 붙들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애」뿐 아니라 「북쪽 별을 찾아서」(북성포구, 긴담모퉁이), 「플러싱의 숨쉬는 돌」(북성포구), 「부들 사이」(수문통), 「검은 설탕의 시간」(인천 내항), 「마중」(자유공원), 「허니문 카」(송도유원지) 등 이 책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담은 이야기가 인천의 여러 장소들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중 어느 곳도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아서, 하나하나의 장소가 지닌 고유한 기억들이 각각의 이야기들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이 책을 쓴 것이 인천의 기억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요컨대 양진채는 인천의 여러 장소들로부터 우리에게 잊힌 기억들을 건져내 다시 활성화하는 글쓰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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